2013년 5월 14일 화요일

[Economics / Society] 통계의 지배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많은 경영학과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종은 금융권 진출, 특히 골드만삭스나 모건스탠리와 같은 외국계 투자은행 취업이었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로 투자은행이나 월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지만, 역시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생각하는 외국계 투자은행가들의 전형적 모습은 영화 "월 스트리트"에서 가장 잘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잘 다려진 양복에 실크 타이를 두르고 낮에는 바쁘게 일하고 화려한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는 뱅커들의 모습은 나를 비롯하여 많은 젊은 경영학도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리라.

하지만 최근까지 정작 골드만 삭스나 모건 스탠리와 같은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수익을 많이 올리는 분야는 M&A나 주식/채권 발행 등의 전통적인 투자은행업이 아닌 자기자본 거래(prop trading) 였다. 소위 프랍 트레이딩이라고 불리는 한동안 핫했던 분야는, 투자은행/증권사들이 남의 돈으로 유가증권을 매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본금으로 여러가지 자산을 매매하면서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돈을 버는 곳이다. 이 프랍 트레이딩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단기자금을 끌어와 자본금의 몇배에 달하는 레버리지를 일으키면 아주 낮은 퍼센티지의 수익만 올리게 되더라도 그 절대 액수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2008년 3월 말 리먼브러더스가 보고했던 자기자본 대비 총 부채비율은 15.4 였다. (물론 이 정도도 상당한 양의 부채가 여러가지 복잡한 회계기법을 통해서 감추어진 수치이다) 이 프랍 트레이딩 기법의 선구자가 골드만 삭스였다. 이에 대해 혹자는 골드만 삭스는 헤지펀드가 되려하고, 다른 투자은행들은 골드만 삭스가 되려하고, 은행들이 투자은행이 되려고 하는 기현상으로 인해 금융 시스템 전체가 부실해지고, 서브 프라임 파국 사태를 맞았다고 냉소한다.

여러가지 복잡한 거래기법과 투자구조들이 발전되는데다, 갈수록 복잡해져가는 파생상품은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학부 졸업생들이 전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개념이다. 특히 CDO나 CDS 등 담보자산의 위험을 쪼개어 다시 풀링해서 만드는 구조화 금융상품은 고도의 수학적 기법과 통계적 지식이 필요하다. 때문에 수년 전부터 미국에서 각광받고 있던 직종이 바로 이런 상품들을 설계하고 위험과 수익을 계산해내는 퀀트들이고, 이런 퀀트들은 대부분 수학 및 통계 관련학과 졸업자들이다. 나이가 들면 노쇠하는 동물적 감각에 의존하는 트레이더들과는 달리, 이 퀀트들은 굵고 길게 간다는 장점이 있어서 금융공학 대학원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경영대학원은 앞다투어 금융MBA 과정을 열었다.
비단 금융이나 재무론에서만 수학과 통계가 중요해졌을까? 시기적으로 조금 앞서 있기는 하나, 금융/재무론의 원류인 경제학 역시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의 옷을 벗고 숫자와 통계 데이터로 무장한 계량경제학(Econometrics)이라는 새 옷을 입고 기존의 통설들을 뒤집으며 부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경제학에 수식을 도입한 것의 원류로 보는 것은 알프레드 마셜과 그의 제자들인 마지널리스트들이나, 기폭제가 된 것으로 보는 인물은 폴 사뮤엘슨이며, 계량경제학의 기초가 완성된 것으로 보는 시점은 1950년이다.

특히,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고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에 평화(이견이 많겠지만 이 역시도 '통계적'으로 입증된 수치이다)가 지속되어, 외교나 정치보다는 경제가 훨씬 중요해졌다. IT 기술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세계경제는 더 빠르게 통합되어 갔으며, 1971년 금태환 중지 이래로 더욱 더 정교하게 발전해온 외환 및 파생상품 시장 역시 세계화되며 복잡성을 더해갔다. 그 어느때보다 복잡하고 국제화된 세계경제. 이 세계경제의 현황을 진단하고 앞날을 모색함에 있어서, 코끼리의 어느 한 신체부위만을 만지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지표들의 중요성은 그 어느때보다도 커졌다.

재무론과 경제학 뿐만이 아니다. 작년도 미국 대선을 분석한 미국 주요언론이나 싱크탱크들의 글을 보면, 생소한 이름의 정치평론가들이 나와서 지금 막 생각해낸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 한국 미디어들의 정치프로와는 달리, 실증적인 데이터들에서 염출한 객관적인 수치들을 이용해, 상당히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또 객관적인 분석을 제공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또, 각 대선 캠프들도 통계전공자들을 다수 기용해, 어떤 정책이나 어떤 이미지들이 후보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선거에 이용한다는 내용의 칼럼 역시 인상적이었다.

지성의 대결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증거'이다. 그 중에서도 통계적인 유의미성을 갖는 데이터는 단연 으뜸이다. 극단적일 수 있는 역사적인 선례 한 두가지를 드는 것보다, 축적된 통계수치를 통해 얻은 데이터는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입증되지 않은 완벽한 논리보다는 실증된 통계수치들이 훨씬 더 믿을만 하다. 단순하게 생각을 해보자. 난 야구는 잘 모르지만, 야구경기를 볼 때에, 정말 무식하게 야구를 모르는 사람으로써, 각 야구팀의 전력을 비교할 때에 쓸 수 있는 가장 1 차적이고도 객관적인 방법은 우선 코치의 전적들을 분석하고 각 타자들의 타율을 비교하는 것아닐까?
(실제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머니 볼'을 보면, 아이비리그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야구광이 통계를 이용하여 지지부진하던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나온다. 물론 주인공 브래드 피트가 아이비리거는 아니고, 그의 핵심 참모가 그 역할을 한다) 

사실 숫자와 데이터만큼 공정하고 가치중립적인 것들은 없다. 나도 한동안은 이러한 계량/통계적 방법론에 다소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사실 잘 생각을 해보면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의 실수이거나, 혹은 해당수치의 중요도 및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의 능력부재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중국정부처럼(굳이 지목하자니 그렇지만) 미가공 데이터(raw data)의 기록 단계에서부터 정확하지 않은데다 최종 데이터 염출에 있어서 (정치적인 의도로 인해) 조작된 경우일 것이다. 때문에 통계기관의 독립성 및 건전성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객관적 통계가 없던 과거에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무조건 옳은 것이고 믿고 따라야 했다. 어른들은 소위 경험을 통한 '통찰'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로 인해 그들의 권위과 권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기후변화에 민감한 농경사회였던 동양에서 더욱 심했다. 어르신들이 "어이쿠 무릎이 쑤시는 걸 보니 비가 오려나보다." 하시면 타당성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유목/수렵민들은 이러한 경험보다는 육체적 민첩성과 힘이 더 중요했고, 상업이나 공업이 발전한 사회에서는 독창성과 손재주가 더 중요한데 반해, 농경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개인의 오랜 삶을 통해 얻은 주관적 통찰을 갖고 있는 노인들의 말씀이 절대적이었다.
(기후가 농경에 갖는 중요성은 거의 절대적이다. 아직도 최대 농업기업인 카길의 분석관들이 주로 하는 일은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기후 및 지리를 분석하는 일이라고 한다. 사실 고대사회의 지배계급이었던 사제들은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들을 통해서 기후의 변화를 예측하는 일들을 독점함으로써, 그 지위를 세습하고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주관적 경험에 의존한 '통찰'보다 통계가 어쩌면 훨씬 더 객관적이고, 심지어는 또 민주적이기까지 하다. 데이터만 있다면 젊은이와 노인이 동등한 입장에서 논쟁을 벌이고, 권위에 의한 일방적인 복종이 아니라 객관적인 수치들을 바탕으로 생산적인 논쟁을 끌어갈 수 있으며, 이 데이터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젊은이가 노인을 이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환생을 해 우리 사회의 성 문란을 개탄하며 "남녀칠세 부동석!" 이라고 한다고 치자. 유교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나는 전세계 여러 국가들의 데이터를 긁어모으기 시작할 것이다. 남녀가 어린 시절부터 조화롭게 교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는 경우의 폐단에 관한 전세계의 통계 데이터를 모아와서 TV 토론회에서 공자가 보는 앞에서 깔끔한 도표와 수식으로 제시한다.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쉽게 말하면, 나 같은 일개 학부 졸업생도 얼마나 좋은 데이터를 많이 수집하고 잘 분석하느냐에 따라서, 공자같은 '성현'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만들어낸 도그마를 깨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라인하트-로고프의 논문의 데이터 오류를 처음 지적한 것도, 노벨상이나 클라크 메달을 수상한 대 경제학자가 아닌, 박사과정 학생이라는 것을 보면, 통계가 얼마나 상아탑을 더 민주적이고 객관적인 곳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약 여전히 개인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반영하는 주관적 '통찰' 위에 지어진 논리로 모든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풍조가 학계에 만연했다면, 일개 박사과정 학생이 로고프나 라인하트 같은 대학자들의 논문에 감히 딴지를 걸 수 있었을까? 물론 걸 수는 있었겠지만, 연륜을 갖춘 대학자들에게 논쟁에서 지거나, 혹은 학계의 기득권들에게 묵살을 당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데이터에 근거해 결과를 염출하는 학문적 풍토에서는, 그 결과에 반하는 명백한 근거(데이터)를 제시한다면 언제든지 결과가 번복되거나, 생산적인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다.

옳지못한 결과의 번복과 생산적 논쟁에 대한 가능성은 창의적이고 열려있는 학술적 풍토와 이내는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지배계층이나 기득권의 철학이나 논리가 아닌, 객관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진리를, 혹은 더 나은 결과를 추구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바로 수치에 근거한 통계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어쩌면,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만큼은, 객관적인 통계수치가 당분간은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