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전세계를 강타했던 환율전쟁의 어두운 기운이 다시 세계경제를 감싸고 있다. 제외한 주요국의 중앙은행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경쟁적으로 돈을 찍어내고 있다. 아베노믹스, QE, 오퍼레이션 트위스트, 스왑 등등 어떤 방법으로 불리든, 이 모든 통화정책의 골자는 종이돈을 찍어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의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어, 현재의 경제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비단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당과 야당 모두, 혹은 기업들이나 일반 국민들 역시도 누구 하나 희생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에 오늘날의 경제문제 해결이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결과는? 현 시점에서 가능한 유일한 선택지는 중앙은행장의 결정이 있으면 언제든지 돈을 찍어낼 수 있는 통화정책 뿐이다.
하지만, 통화정책은 그 자체만으로 현재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지난 몇년간의 정책수행의 결과에서 잘 드러났다시피, 중앙은행 당국이 의도했던 바와는 관계없이, 돈이 실물경제 혹은 가계로 제대로 흘러 들어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다국적 기업과 금융기관의 현금 보유량이 치솟고, 원자재의 가격이 폭등하고, 실제경기지표와는 관계없이 일부 국가의 주식시장만이 과열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기업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당장 리스크 관리를 위해 현금을 보유하고, 펀드 매니저는 원자재나 일부 주식시장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가장 최적의 선택일 수 있으나, 경기를 진작시키고자 하는 중앙은행가들의 의도했던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더 큰 문제는, 더 많은 돈을 찍어내면 찍어낼수록, 일반서민들의 가처분 소득은 감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통화주의 경제학의 아버지인 밀턴 프리드먼이 말했던 것처럼 인플레이션은 순전히 통화와 관련된 문제이다. 과도한 유동성으로 인해 물가는 상승하지만, 사람들의 명목임금은 이에 맞추어 상승하지 않는다. 반면, 실물자산이나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부유층들은 자산가격 상승의 효과를 볼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산층의 붕괴로 이어지고, "경제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종이화폐를 찍어내는 통화정책의 이점도 있다. 가장 많이 기대되는 효과들 중 하나는 '부의 이전'(transfer of wealth) 효과이다. 화폐의 상대적인 가치가 줄어들면, 그만큼 채무자와 채권자 간 부의 이전이 발생한다. 한 국가경제 내 개인 채무자들의 부채만이 탕감되는 것이 아니라, 환율이 절하되므로 빚에 허덕이고 있는 선진국 경제들의 채무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소비를 진작시켜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가져올 수 있다.
또 다른 기대효과로는 '부의 효과'(wealth effect) 이다. 이는 통화당국이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할 목적으로 금리를 인하한다면, 자산가격이 상승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소비를 진작시키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실제로 부동산 경기 같은 경우는 주택이 개인의 재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경기를 판단하고 경제정책을 수립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지표임에는 틀림없다. 또, 미국 같은 경우는 주식시장은 연기금의 많은 부분이 미국 내 주식시장에 투자되어 있기 때문에, 주가의 변동에 따라 민간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되거나, 호전될 수 있다.
세번째로, 통화공급이 증가하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해당 통화의 상대적 가치가 절하되고, 이로 인해 가치가 낮아진 자국 통화는 더욱 경쟁적이어진다. 이러한 경쟁적인 통화는, 적어도 이론 상으로는, 자국의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을 낮추므로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갖게되며, 동시에 수입품의 가격이 비싸지기 때문에 외국 기업들의 국내진입을 막는 효과를 갖는다. 경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에서, 통화를 절하시켜 순수출을 늘리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GDP는 가계소비, 기업투자, 정부지출, 그리고 순수출로 구성되는데, 가계가 소비를 하지 않고,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고, 정부가 더 이상지출을 할 여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순수출을 늘리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하지만, 경제학의 황금률과 공존의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자국의 국익이 우선인 냉혹한 현실에서는, 경쟁적인 통화가치 절하는 군비증강과 다를 것이 없다. 타국의 통화가치가 절하되어 자국의 순수출이 줄어들게 된다면,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통화를 평가절하시키려 할 것이다. 경기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최대교역국인 중국을 대상으로 환율전쟁의 칼을 뽑아들었고, 하나 둘 씩 참가해 어느새 일본도 아베노믹스를 들고 환율전쟁에 참가했다. 우리나라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엔화가치 절하에 대응하여 수출기업들의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하다. 브라질 재무장관 Guido Mantega가 말했듯이 새로운 환율전쟁의 서막이 울리고 있는 것이다.
LTCM 파산 당시 주요 협상자들 중 하나였고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Currency Wars: The making of the next global crisis"의 저자인 James Rickards에 의하면 20세기 초의 환율전쟁은 1921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전쟁배상금을 상환하고 자국상품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통화를 절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마르크 화 붕괴를 염두에 두고 한 행위는 아니었겠지만, 이는 결국 주변국들의 경쟁적인 통화가치 절하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마르크화를 붕괴시키고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통화가치의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이 나치의 집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다시 오늘날의 세계, 특히 우리가 위치한 동아시아로 돌아와 보자. 미국과 중국이 이미 환율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주요 수출국인 일본이 가세했다. 엔화 가치가 낮아져 일본상품이 경쟁력이 생긴다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이 누구일까? 수출에 의존한 경제모델이면서, 그 제품에는 큰 특색이 없는 한국, 대만, 중국이 그들일 것이다. 국내 실업률이 치솟고 경기지표가 악화되는데 가만히 앉아서 손해볼 국가는 없다. 한국, 중국, 대만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통화가치를 절하시키는 정책을 취할 것이다. 이는 다시 미국과 일본의 통화 당국자들에게 고민을 가져온다. 이러한 경쟁적 평가절하가 어느선에서 수렴될 지, 혹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튀어 20세기 초와 같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역사는 대체로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 방향이 긍정적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