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를 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지폐는 한국은행권 만원권일 것이다. 이 만원권의 앞면에는 우리 국민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선군,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그려져있다. 모든 화폐가 그렇듯 만원권은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 의해 가치가 보증된 수표이며 이것의 가치에 대한 신뢰는 대한민국 경제력과 국력에 대한 신뢰이다.
중국의 화폐는 인민폐이다. 인민폐 1, 5, 10, 50, 100 위안권에는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서방세계의 '환율조작국' 의혹에도 불구하고 연일 그 가치가 상승하고 있는 위안화는 오랜기간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을 제치고 G2 로 새롭게 떠오르는 중국경제의 위상을 잘 나타낸다. 실제로 지난 18일,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은 중국이 관리변동환율제를 채택한 93년도 이래 거의 20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중국정부는 위안화의 세계화를 위한 노력에도 적극적이다. 주변 교역국들과 통화 스왑을 체결하고, 인프라가 낙후된 인접국가들에 SOC 건설에 자금을 제공하고, 무역대금 결제를 위안화로 하기 위한 협정을 맺는 등 위안화의 영향력 확장을 노리고 있다.
(모택동의 얼굴이 새겨진 위안화, 중국은 위안화의 세계화를 도모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달러와 위안화의 경쟁을 주목하고 있다. 자국의 역사적 지도자의 초상화가 새겨진 화폐를 가장 널리 유통시키기 위한 이 경쟁의 승자가 결국 21 세기 경제패권을 장악하는 국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헤게모니를 어느국가가 가져갈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화폐전쟁에 정신이 팔린 정작 우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중국이 야금야금 북한 북부 경제특구로 지정된 지역들로부터 시작해 모택동의 얼굴이 새겨진 위안화를 배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래 대한민국이 통일된 시점에서의 국경선을, 혹은 한중 양국의 한반도 북부지역에 대한 실효지배지역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지난달 말, 국내 언론들은 일제히 황금평 및 나선 등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역 경제특구에서 중국 위안화가 북한 화폐와 함께 공식 화폐로 통용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북한이 손을 벌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중국이다. 이 틈을 타고 중국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북한 북부지역의 경제적 지배를 통해 만주로부터 한반도 북부까지의 지역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경선을 암암리 혹은 공식적으로 넘나드는 자국상인들의 일련의 상거래활동으로 시작하여, 중국은행들의 차관제공이나 기업들의 직접투자 등으로 그 영역을 넓히고, 인민폐가 북한지역에 통용되게 된다면, 정치적/군사적으로 국경선을 긋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명목상으로는 북한의 영토이지만, 이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국 기업에서 일을 하고, 중국제품을 쓰며, 이 모든 경제활동의 대금결제가 중국의 돈인 인민폐로 이루어진다면, 이 지역을 북한의 영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위안화 통용이 공식화 된 북한 내 경제특구)
<북 경제특구 화금평에 중 위안화가 공식화폐>, 매일경제 9월 27일자 기사 中
어떠한 화폐가 통용된다는 것은 그 화폐가 통용되는 지역이 화폐를 발행하는 나라의 영향권, 좁게는 경제적 영향권,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기축통화를 갖는다는 것은 전세계가 해당화폐를 발행하는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권 안에 있다는, 즉 패권국가임을 뜻한다. 전세계 외환결제의 약 80% 이상이 미국의 화폐인 달러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세계 상거래의 80%가 달러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국가 간의 무역은 해상운송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화물을 실은 선박들의 해상운송로에 대한 접근 전세계에 파견되어 있는 미국 해군의 승인 하에 이루어진다. 전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인 원유는 대부분이 중동지역에 매장되어 있으며, 중동지역의 정치/안보는 궁극적으로는 펜타곤에서 결정된다. 결국, 기축통화가 달러라는 사실은 전세계 정치/경제가 미국의 영향력 안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지 워싱턴호 전투항모전단. 중동의 유조선부터 일본의 참치잡이 원양어선까지 지구 상 모든 선박들은 모두 미 해군의 감시 아래에 있다.)
반면, 어떤 화폐가 발행국 정부의 영토임에도 그 안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면, 해당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없거나, 해당지역에 대한 정부의 경제적 영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청제국 말엽 빈번한 화폐개혁의 실패로 인해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중국을 정치나 군사적으로 공략하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잠식하고자 했던 영국은, 중국진출 교두보였던 홍콩에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영국계 은행들은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고, 신용도가 높은 어음을 발행 및 유통시켜주며 결국은 발권권한마저 가져왔다. 이 후 중국대륙은 홍콩을 통해 대영제국에 의해 경제적으로 지배되었다. 중국이 홍콩에 반환된 이후에는 기존에 발권권한을 갖던 스탠다드 차타드 은행과 HSBC 은행 외에 중국계인 중국은행(Bank of China) 역시 발권권한을 갖게 되었지만, 이들은 모두 민간은행이며 중국의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People's Bank of China)과는 다르다. 홍콩은 중국령이지만 여전히 공산당이 통제하기는 어렵다. (사실 상하이를 금융허브로 육성하고자 하는 중국정부의 움직임은, 통제가 어려운 홍콩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고 금융시장을 정부통제 하에 두고자 하는 포석이 깔려있다는 의견이 있다)
(HSBC가 발행한 홍콩달러. 영국에게 경제적으로 지배받았던 중국의 뼈아픈 과거의 상징이다)
이처럼 어떤 지역에서 어떠한 화폐가 이용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중동과 같이 민족이나 문화의 이질성이 극단적으로 강하지 않은 경우, 어떤 지역이 해당국가의 정치적 영향권 안에 있기위한 선결요건은 경제적 통합이며, 경제적 통합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해당통화의 통용이다.
북한 일부지역에서 중국의 화폐가 통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북한은 중국의 경제적 영향권 안에 종속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실제로 지금까지 북한에 투자한 중국기업은 100여곳에 달하고 총 투자금액이 3억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투자분야 역시 다변화되고 있다. 이처럼 경제적 예속화를 위한 중국의 움직임들을 이 지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동북공정과 맞물려 생각해본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중국이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한 상태에서, 북한 북부지역에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위안화가 통용되고 경제적으로 중국에 종속된다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종속시키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멀지 않은 미래에 통일이 다가온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든 이 지역은 격랑에 빠질 것이다. 북한 내부에서의 사회적 혼란 및 정치적 분열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지역을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들 역시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 지역에 정치적/군사적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특히 이 지역에 대한 자국 기업들의 투자가 상당부분 진행된 중국은, 자국 기업 및 자국민의 경제적 이익과 신변보호라는 좋은 명분을 얻게되고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치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북한 북부지역의 주민들 역시, 기존에 위안화를 통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편하고, 중국기업들이 친숙하게 느껴진다면 여기서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다. 북한의 북부지역이 송두리째 경제적/정치적으로 중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통일된 대한민국은 조선왕조가 지배했던 오롯한 한반도가 아니라, 고려왕조의 국경선을 갖게될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얼이 살아 숨쉬고 세종대왕이 4군 6진을 설치했던 우리 땅에서, 모택동의 얼굴이 범람하지 않도록 종합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고려의 국경선. 신의주와 나선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북부지역의 경제가 중국에 예속된다면 통일 대한민국은 한반도 전체가 아닌, 고려왕조의 국경선을 갖게 될 것이다.)
두산Encyber.com 자료
(세종대왕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4군 6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경선은 사실 상 세종대왕 때 설정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자료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다보니 원래 의도하려고 했던 문제들 중 일부-이를테면 자국통화를 갖는다는 것의 의미, 금융의 중요성 등-가 누락되고 정치경제적인 요소들 위주로만 글이 흘러간 것 같네요.
답글삭제국가의 화폐는 주권의 상징이자 독립된 경제/예산 정책을 추구하기 위한 핵심 요소이다. (A national currency is boh a symbol of sovereignty and the key to the pursuit of an independent economic and budget policy) - Martin Feldstein, 전 전미경제연구소(NBER)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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